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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멈추지 않을 기세로 계속 내렸다. 뉴스에서는 교도소를 탈출한 신찬원에 대해서 계속 정보를 제공했다. 검거가 되지 않으니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기말적인 분위기에서 그의 홍길동 같은 행각은 젊은 층의 응원을 끌어내기도 했다. TV를 보던 엄마가 한 마디 던졌다.
“사람을 해하지 않고 다니는 게 다행이다.” “얼굴도 잘생겼어. 왜 저 얼굴로 범죄자가 됐지?” “어렸을 때부터 먹을 게 없어서 이것저것 훔쳐 먹었다지 않니? 환경이 중요해.” “그건 어렸을 때지, 성인이 되면 일해서 먹고 살아야지.” 나는 엄마와 새미의 대화를 들었다. 언론에서는 다양한 각도로 그의 생애를 보도했는데, 대체적으로는 범죄에 초점을 맞췄다. 어떤 신문은 신찬원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조명하면서 사회적인 책임에 포커스를 맞추다가 다른 언론사의 질타를 받았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뭘?”
“환경의 문제야? 개인의 문제야?” 새미가 로투스바카라 어른이 되니 이렇게 복잡한 논쟁도 감수해야 했다.
“개인의 욕구충족이 사회 구조상의 어려움으로 불가능하다면 누구 책임이 더 클까?” “사회를 바꾸든지, 아니면 개인의 욕구를 줄여야지.” “개인의 욕망을 사회에서 허용되는 선으로 줄여야겠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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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너는 고기는 먹을 수 없고, 빵만 먹을 수 있는 계층이야. 이렇게 단정한다면. 그 사람은 고기를 포기해야 할까?”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말이야? 우리나라는 그래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잖아.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지는 건 아니니까.” “성장 과정에서 환경이 사람의 생각을 한정시키는 거야. 성공을 거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좌절만 반복한 사람은 금방 포기하거든.” 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그렇겠다. 누구나 극복할 수 있다면 도움을 줄 필요가 없지.” “벼룩 실험 알지? 비커에 벼룩을 집어넣고 유리로 막고 실험하는 거.” “알아. 벼룩이 뛰면서 유리 천장에 계속 부딪히잖아. 유리를 제거해도 벼룩은 자기가 뛸 수 있는 높이를 잊어버리면서 딱 비커 끝까지만 뛰잖아.” “30cm를 뛸 수 있는 벼룩이 10cm로 제한당하는 거지.” “무기력이 학습되어 능력이 제한당한다?” “빙고!”
엄마는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못 알아듣겠지만 너희 둘이 똑똑해 보인다.” “오빠는 오빠가 맞네. 나보다 훨씬 똑똑해.” “연무는 애 낳을 때가 되지 않았니?” 나는 달력을 봤다. 5월 초순.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였다.

“5월 말에 아기가 태어나겠다.” “이번 조카는 예쁘겠다. 언니 얼굴이 예쁘잖아. 연무 오빠도 귀엽게 생겼고. 딸이면 좋겠다.” 새미는 두 번째 조카를 기대했다. 오빠들만 보고 자랐으니 여동생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나 보다.
“전화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니?” “내가 통화했어. 다음 주가 예정일이야.” “그래? 건강하게 태어나야 할 텐데.” “좋은 병원에 다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첫 출산이니까 안전한 병원을 찾는 형수의 마음이 이해가 갔지만, 내가 삐뚤어져서일까? 가까운 병원을 두고 굳이 먼 병원에 다니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토요일인데 오빠는 데이트 안 해?” “데이트가 뭐냐?” “오빠는 결혼 안 할 거야? 지구가 올해 망할지도 모른다는데 결혼은 하고 죽어야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IMF 분위기에서 다 망했으면 좋겠다는 일부 사람들의 기대와 맞물려 믿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말.
나는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간주했다. 오픈홀덤
“왜 망하냐? 숫자가 2,000으로 바뀐다고 망해?” “밀레니엄 버그라는 게 있다며? 그래서 컴퓨터가 오작동 돼서 핵이 발사될지도 모른다는데?” “너는 망했으면 좋겠어?” “아니지. 11월에 음반 나오는데, 그럴 수는 없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 믿지 마.” “오빠, 노스트라다무스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등장, 프랑스 혁명, 원자폭탄 투하 등도 맞췄다는 게 사실이야?” “다 끼워 맞추기야. 그리고 예언한 놈들이 한 둘이겠냐? 그중에 비슷하게 맞춘 놈이 생기는 건 확률적으로 당연한 거야.” 나는 새미의 표정이 심각해서 웃음이 났다.
“그럴 일 없으니까 음반이나 열심히 준비해. 나는 데이트하러 가야겠다.” “데이트?”
새미가 앞을 막아섰다.
“누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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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구와 상혁이랑 만나기로 했어.” “그 오빠들도 애인 없어?” “몰라.”
“정말 한심한 삼총사네.” “그러냐? 한심해 보여도 어쩔 수 없지.” 나는 새미의 등을 두드리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너무 거세게 몰아쳐서 우산을 펴기 힘들었다. 동네에 있는 꼬칫집으로 들어가자 상혁이와 재구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상혁이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인마, 힘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 매일 얼굴이 초상집이냐?” “보자마자 갈구냐? 안 그래도 내가 뭐라고 했다. 상혁이가 힘들긴 힘든 모양이다.” 나는 상혁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살포시 웃으며 애써 괜찮다고 시위했다.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아주 회사가 사람을 죽이려고 들들 볶나 보다. 상혁아, 우리 가게로 와. 운동도 하고 돈도 벌고,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재구 가게로 가도 되겠다.” “정말 괜찮아. 피곤해서 그런 거라니까.” 상혁이는 술병을 들고 내 잔에 따랐다.
“마시자” 세이프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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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왔어?” “20분 됐나?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술 마시기 좋은 날이지. 마셔.” 건배하고 술을 마셨다. 빗소리를 들으니 술이 쉽게 넘어갔다. 나는 상혁이 누나가 걱정됐다. 그의 어두운 얼굴이 누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괜찮아?” “지금은 집에서 쉬면서 병원 다니고 있어. 세이프파워볼 그럭저럭 괜찮아.” “힘들면 얘기해. 내가 아는 큰 병원이 있으니까.” 민창욱이 입원했던 새울림 병원. 민유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렵지 않게 병상을 확보하고 치료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내 최고의 병원이라 병원비가 부담됐으나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율무 말 들어. 너도 바쁜데 누나 혼자 힘들 거 아냐? 큰 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는 게 좋지.” “고맙다. 생각해볼게.” “부담가질 필요 없어. 친구니까 해줄 수 있는 거야.” “율무에게 얘기 들으니까 생선 냄새도 네가 뒤집어썼다며? 나 같으면 쪽팔려서 그렇게 못한다. 상혁이 너도 참 대단해.” “진짜 그때 생각하면 끔찍하다. 생선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니까.” “맞아, 그랬었지.” 상혁이는 회상하면서 살며시 웃었다.
“율무도 참 고생 많이 했어. 중학생이 새벽마다 생선 팔러 다니고, 학교에 오면 생선 냄새가 진동하니까 많이 싸우기도 했고.” “그랬어?”
“학기 초에는 항상 싸웠지. 뒤에 있는 껄렁한 애들이 율무를 전혀 몰랐으니까.” “어떻게 됐어?” 재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음 말을 재촉했다.
“뻔하지 않냐? 시골에서 낫 들고 경운기 몰고 다닌 애한테 상대가 되겠어? 얼굴만 곱상하게 생겼지, 체격도 좋잖아.” “완전 피떡으로 만들었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덩치 큰 녀석이 율무 멱살을 잡고 끌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걸어서 메치더라. 공중에서 붕 뜨더니 돼지 한 마리가 바닥에 바로 꽂혔어. 걔 똘마니들이 모두 덤볐는데, 단 세 방에 끝났지.” “뭐야? 무협지야? 어디서 뻥을 쳐!” “네가 한 번 율무랑 싸워보든가.” “하하. 그건 말도 안 되지. 체급에서 차이가 나잖아. 하기는 율무가 힘도 세고 독기가 있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다.” “술이나 마셔. 무슨 독재자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술잔을 부딪치고 술을 목으로 넘겼다.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술이 달았다. 재구가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할렘가에서 살던 우리가 잘 크긴 했다. 사고도 안 치고, 바르게 자랐어. 스스로 칭찬해.” “할렘가냐?”
“무허가촌이었으니까 할렘가지.

” “너희들이야 기반을 잡았지만 나는 아직 멀었어.” “그래도 좋은 학교 나오고 좋은 회사 들어갔잖아. 물론 일이 힘들어서 고생이지만.” 재구는 상혁이의 눈치를 봤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와 재구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상혁이는 사회 초년생에서 갓 벗어났으니까. 집도 이사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상혁아, 혹시 경제적으로 쪼들리면 얘기해. 돈 많은 친구가 둘이나 있잖아. 이자 안 받고 빌려줄게.” “나도 너 오기 전에 상혁이 누나 얘기 듣고 깜짝 놀랐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돈 문제는 편하게 얘기해.” “그래. 고맙다.” “말만 하지 말고. 너는 항상 너 혼자 해결하려고 하더라. 그거 좋지 않은 태도야. 혼자 살려면 무인도에 살지. 왜 같이 어울리고 살겠냐?” “알았어. 다른 얘기 하자.” 주제가 상혁이에게 집중되어 있어 불편할 것 같았다. 나는 가장 최근의 소식을 전했다.
“수연이 결혼한다.” “정말? 언제?”파워볼사이트 “10월에 날 잡았어.” “네가 연결해준 거잖아. 둘이 잘 어울렸어. 잘 됐다.” “회사는 잘 된다니? 나는 연예인 소속사는 잘 몰라서.” “잘 되고 있어.” “새미 노래도 떴잖아. 돌아다니다 보면 레코드 가게에서 많이 나오더라고.” “새미도 잘 되고 있고.” 재구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축의금은 얼마나 해야 하냐? 대기업 아들이라 5만 원은 너무 적잖아. 분명히 호텔에서 할 텐데.” “너는 100만 원 해야지.” “내가 왜?”
“수연이 좋아했잖아.” “미친놈.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거든.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게 내 좌우명이야.” 재구는 술을 마시면서 나를 얄밉게 쳐다봤다. 본인은 부정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나는 개구쟁이 재구가 수연이 앞에서는 얌전해지는 걸 수차례 봤었다.
“비가 오니까 술이 잘 들어간다. 마시자.”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수다는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오가며 낄낄거렸다. 상혁이의 얼굴이 밝아져서 마음이 놓였다.
재구를 먼저 보내고, 상혁이와 걷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은 말을 들었다.
“율무야, 나 월요일에 출장 가.” “출장? 갑자기?” “그렇게 됐어. 필리핀으로 가. 내가 없는 동안에 네가 우리 누나 가끔 돌봐줘.” “얼마나 있는데?” “일주일 정도 있을 거야.” “그래서 얼굴이 어두웠던 거구나. 집도 가까우니까 가끔 들려서 누나랑 얘기하고 놀면 돼. 조심히 다녀와.” “그래. 고마워.” 상혁이는 비로소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빗소리에 잠이 깼다.세이프파워볼
숙취로 인해 물을 마시려고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거실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비가 어둠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져 신문을 확인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놓인 신문을 들고 습관적으로 1면을 보는데.
전쟁을 알리는 총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는 신태평그룹 최성영 회장의 아내 서형자 씨는 남편의 구명을 위해 현 검찰총장의 아내 연숙희 씨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 고위 공직자 부인들이 드나든다는 강남의 한 의상실에서 작년 12월 중순부터 올 초까지 불과 20여 일 동안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의류가 로비용으로 쓰인 것이 확인됐다. 사직동 팀 내사로 시작된 이 사건은 서울지검에서 사건의 본질을 밝히면서 재벌과 권력의 유착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
    내 관심은 이게 아니다. 곁다리로 들어갈 사건.
    역시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 IMF를 불러온 대기업들의 부도덕한 행태는 비단 옷 로비 사건뿐만이 아니다. TJ 건설은 과거 레미콘에 해사(海沙)를 사용했다는 내부 폭로가 있었다. 당시에는 타계한 민창욱이 적극적인 로비로 막았다는 소문이 건설업계에는 파다했다. 이번에는 TJ 건설이 쉽게 빠져나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분당 아파트 건설 때 약속했던 절반의 서민용 임대 아파트는 10% 이하로 축소해서 분양을 끝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업 변경이었는데 여기에 정치권과 공무원에 막대한 로비를 했다는 투서가 들어왔다. 검찰은 이 투서가 많은 자료를 포함하고 있어 매우 신뢰하고 있다고 밝혔다. TJ 건설은 이밖에도…….
    여기까지 읽던 나는 신문을 접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리고 나도 결정할 시점이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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