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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 김안녕 / 김안녕 / 비극] 첫 페이지의 상단에 제목과 역할과 장르가 적혀 있었다. 중앙엔 지구로 보이는 푸른 구체가 자전하는 중이었으며 손을 대자 한반도, 남한, 서울로 점차 확대되더니 태어난 장소까지 도달. 그리고 다음 순간 생전 기억이 수백만 배의 속도로 눈꺼풀 안쪽에 재생되었다.
얼굴이 검게 칠해진 부모. 보육원에 버려지는 나. 어려서부터 험한 일터를 전전하다 16세에 몹쓸 양부모에게 입양되는 바람에 힘겹게 모은 재산이 양육비 명목으로 강탈당했다. 스물 즈음에 만난 연인은 알고 보니 장기털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꽃뱀이었으며 서른엔 뇌에 암 덩어리가 들어서 3년을 버티다 병상에서 사망.
‘비루한 삶.’
눈사람은 빛 알갱이들로 허공에 글씨를 새겼다.
[무작위 스크롤 지급, 감정 완료.] 동시에 책의 두 번째 페이지 상단에 문자가 새겨졌다.
[두 번째 이야기 : 세 번 떨어진 고블린 / 아기 고블린 / ?] 페이지의 중앙에는 회색빛 동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빛이 간신히 닿는 장소에 거적때기로 덮인 물체가 보였다. 피 묻은 얇은 천 위로 드러난 윤곽은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시체.’
그 옆엔 해당 시체의 자식으로 여겨지는 아기가 동굴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는 그림. 손을 페이지 위에 놓자 첫 페이지 때와 마찬가지로 망막 안쪽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숲의 아이, ‘아기 고블린’은 날 때부터 눈알이 없는 선천적 맹아입니다.] ‘나레이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오픈홀덤
영상에선 햇빛을 차단할 정도로 빽빽하게 자란 나무로 구성된 숲이 보였다. 시점이 점차 옮겨지더니 사체와 맹아를 가운데 두고 다시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고블린은 한 달이면 성체로 자랍니다. 하지만 어미를 잃은 ‘아기 고블린’에게 한 달은 너무도 긴 시간이지요. 저런, 당장 살아남기도 버겁겠군요.] 거적에 덮여있던 것은 아기 고블린의 어미였으며, 회색빛으로 가득한 동굴엔 동족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터벅


묵직한 발소리. 동굴을 숨겨주던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코를 벌름이며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돼지머리의 인간. 나레이션은 이 개체를 오크라 칭했다.
가죽옷 바깥으로 드러난 근육이 꿈틀거린다. 그런 놈의 동공에 굴 안쪽으로 꼬물거리며 기어가는 맹아가 깃들었다.
[낯선 호흡 소리에 위험을 감지한 아기 고블린은 힘껏 도망칩니다. 오크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사냥꾼은 한 입꺼리도 되지 않는 작은 것은 내버려 두고 갓 죽어 아직 식지 않은 어미의 사체로 손을 뻗습니다.] 살과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을 맴돈다. 입안에서 발라낸 뼈를 장난스럽게 기어가는 아기 고블린의 옆으로 던지는 오크. 멈칫하는 아기를 보며 낄낄댄다.

[겁에 질린 아기 고블린이 바닥에 난 틈을 발견하지 못하고 손을 헛짚습니다. 그 사이로 몸이 꼬꾸라지는군요.] [아. 행운입니다. 작은 동물도 간신히 통과할 구멍입니다. 아기 고블린이라면 들어갈 수 있겠군요.] 맹아는 어딘가로 이어진 구멍 속 벽과 벽 사이에 끼여 버둥거리다 어느 순간 아래로 떨어졌다.
[던전! 아기 고블린에게 있어 기적이자 불행이군요. 하필이면 바늘오소리 서식지입니다. 바늘오소리는 가죽 표면에 돋아난 바늘을 아음속으로 난사해 침입자를 처치하는 동물입니다. 이런, 벌써 들킨 모양입니다.] 처음엔 천장에서 떨어진 아기 고블린을 경계해 달아난 바늘오소리들이 앙앙대며 울기만 하는 녀석을 향해 바늘을 곤두세웠다. 우두머리 녀석이 침을 쏘려는데, 천장에서 다시 무언가가 떨어졌다.
따닥, 딱 세이프게임
돌벽에 부딪히며 떨어진 그건, 피와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뼈. 아기 고블린이 떨어진 구멍 틈으로 반달처럼 휜 오크의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어미의 뼈군요. 잔혹합니다. 오크는 패자를 능욕하길 즐기죠. 원한을 품고 자신에게 도전한 복수자를 사냥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종족입니다. 아기 고블린은 이 치욕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명예를 다툴 기회는 없겠군요. 바늘오소리가 움직입니다.] 쐐에엑-
바늘오소리 우두머리가 뼈를 보고 놀랐으나 금세 진정하곤 꼬리 부근의 바늘을 모조리 쏘아 보내자 아기 고블린의 전신이 바늘로 뒤덮였다. 끄앙 대던 울음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이윽고 바늘오소리들의 식량으로 전락한다.
[세 번 떨어진 고블린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당신이 변화시킬 결말을 기대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 세 번 떨어진 고블린 / 아기 고블린 / 비극] 밝게 빛나던 눈꺼풀 안쪽이 검게 물들었다. 눈을 뜨자 영상을 감상하는 동안 멀어졌던 귀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


“흐윽, 흑.”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니….” “내가 지켜줄게. 늑대야.” 소란스러운 와중에 손뼉을 쳐 이목을 모은 포겐.
“역할 확인 끝나셨습니까? 그럼 신입 분들은 자신의 책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그게 이 세계에서 칭해질 혼의 이름입니다. 보통 혼명으로 불릴 일은 거의 없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쓰이니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그러면 재도전하시는 분들은 먼저 시작하세요. 이번에는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백색의 책을 덮자 표지에 전에는 없던 빈칸이 생겼다.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헤일로”
[120111109] [&$%@#%%^] [헤일로]
숫자와 이해 못 할 표식이 나타난 뒤, ‘헤일로’라는 한글이 표지에 새겨지더니 곧 뜨거운 커피에 넣은 설탕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헤일로, 많은 이들이 찾는 이름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포겐. 신입을 돌아가며 봐주는 모양이다.

“그런가요?”
“우주의 신비를 겪은 노회한 사람들이 열 세이프파워볼 번째 안으로 떠올리는 단어니까요. 참고로 첫 번째 줄이 무얼 뜻하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12011년 11월 9일. 맞나요?” “월과 날짜는 맞습니다. 이 도시가 만들어진 날부터 시작된 연혁이지요. 두 번째 줄도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신원 확인과 연관되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동명을 구분하는 방법이 필요할 테니.’ “맞습니다. 혼의 주소지 같은 거라더군요.” “그렇군요.”
“두 번째 이야기에 들어가시면, 지구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스킬을 얻게 되실 겁니다. 그걸 잘 활용해서 위기를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포겐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토독 독.
이마를 때리는 차가운 물방울, 연약한 피부를 갈아대는 바닥, 퀴퀴한 곰팡내, 도통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 결정적으로 새까만 시야.


현재 내가 향한 방향이 동굴 안쪽임을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한 발을 옮기기가 두렵다. 정말 이쪽이 맞나? 잘못 디뎌서 구르면?
‘오크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쫓아오겠지.’ 이 이야기가 어떤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진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허망한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기에 일단, 기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얇은 팔이 차가운 바닥에 닿아 피부가 벗겨지고 오한이 듦에도, 앞을 향했다.
영상의 그 아기 고블린 보다는 빨리 움직였는지 차 한 잔 마실 텀을 둔 뒤에야 오크의 발이 수풀을 난폭하게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각이 차단된 덕인지 청각이 기이할 정도로 민감하다. 오크의 숨소리는 물론, 살 스치는 소리, 흥분으로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 턱에서 떨어진 침이 동굴 바닥에 닿는 소리까지 명확하게 들렸다.
[아기 고블린은 용감하게 오크를 마중합니다. 수풀 옆으로 숨는군요. 이번 신입은 판단이 좋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거지요. 그럼 계속 지켜보도록 할까요?] 중계를 하는 듯한 나레이션의 말투. 영상이 재생되었을 때와는 달리 중후하고 묵직한 음성이었으며 목소리 한구석에서 자그마한 장난기도 느껴진다.
나는 동굴에서 생존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여 아예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고자 했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조금도 쉬지 않고 밖으로 기었다.
초반부에 언뜻 보인 숲은 적어도 이 동굴만큼 가까운 곳에 위험이 도사리지는 않았다.
오크는 고블린 사체를 먹기 시작했는지 뼈와 근육과 살점이 강제로 분리되어 발생하는 높고 묵직한 데시벨이 내 고막을 두드렸다.
우웁.

[신입이 개화할 스킬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절망에서의 스킬 개화는 늘 우리에게 흥미를 제공했습니다! 어서, 어서!] 나레이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혹시나 오크가 눈치 챌까 최대한 몸을 숙여 기척을 감췄다. 귀를 기 파워볼사이트 울이자 수풀 저 너머의 오크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고깃덩이를 물어뜯는 중이다.
열기가 사그라들자 이번에는 암흑으로 가득했던 시야에 새하얀 빛이 들어온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그러나 이곳은 지구의 상식을 초월한 사후세계이지 않은가. 무엇이든 가능할 터였다. 그런 기대를 품고 기다리길 십여 초.


[이번 신입은 지구에서 어지간히 굴렀던 녀석인 모양입니다.] 그의 나레이션과는 별개로 처음 영상에서 들었던 여성의 나레이션이 들렸다.
[스킬, ‘고통반전’ 습득.] [고통반전, 1중첩] ‘고통반전?’
단어를 의식하자 시야의 중앙에서 발광하던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회색빛 세상이 펼쳐졌다.
작은 손으로 눈구멍을 더듬어 봤으나 여전히 비어있다. 그런데도 얼굴에 손이 다가오는 이 과정이 또렷하게 보이는 건, 방금 습득했다는 고통반전의 영향일 것이다.
[흔한 내구계열의 스킬이지만, 양산형도 그 나름의 볼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약자가 강자 앞에 놓였을 때의 반응이야말로- 엇, 이런. 제 입이 방정이군요. 오크가 고블린을 발견했습니다.] 킁킁
고블린 하나로는 부족했는지 코를 벌름이며 주변을 돌아보는 오크. 놈은 네발로 기듯이 바닥에 얼굴을 가져다 대곤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곤 히죽 웃는다.
‘제기랄, 바닥의 저 검은 점이 뭔가 했더니 내 피였구나.’ 아무리 연약한 아기 피부라지만 이렇게까지 찢어졌을 줄이야. 나는 황급히 나뭇잎 두어 장을 움켜쥐어 상처에 붙이고 뭐라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없다.

‘하기야 때마침 쓰기 좋은 무기가 이런 한적한 숲에 놓여 있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스킬을 습득하고 효능을 체감했을 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던 방법 하나가 있다.
‘확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선택지가 없다.
[이건 끝났군요. 저대로 죽겠습니다. 기대 이하라고요? 하하, 신인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저들의 광대 짓을 끝까지 봐주는 게 시청자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부담 없이 예정된 미래까지 함께하시지요.] ‘예정된 미래라니, 참 고상하게도 비꼬네.’ “왜엥!”
입을 열어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울었다. 그에 나레이션은 물론이고 오크 역시 크하하 하고 웃는다. 그들이 뭐라 생각할지 예상된다.
미친놈.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세이프파워볼
‘목 아래로 식물인간이 되어도 버티고 살아온 나다. 멀쩡히 움직이는 육체를 두고 포기하겠냐.’ 오크는 나무 옆으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나를 발견하고는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주둥이를 벌려 포효했다.
쿠워어어!
와라,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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