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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새로운 형태의 한중관계 (5) 혈전이 끝난 이후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우리는 인민해방군 소속의 헬기를 타고 우루무치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복귀 임무를 지휘하는 인사는 인민해방군의 대교(大校)였다. 우리가 세이프파워볼 마왕을 주살한 이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렵에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다가와 말을 건 인사였다.
나이는 이제 갓 삼십 대 중반쯤. 한국의 대령이나 준장에 상응하는 계급인 대교를 달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나이였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S급에 해당하는 각성자인 듯했다. 그중에서도 상급.
‘같이 온 애들도 나름 실력자네. 단순히 에스코트만 하기에는 고급자원이야.’ 아마 애초에는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할 요량이었겠지. 어쩌면 우리와 마왕이 맞찔러 죽는 상황을 은근히 기대한 걸 수도 있었다. 우리가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은 것뿐이었다.
지금 그들은 나와 슬기를 무슨 마왕 대하듯이 두렵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딱히 겁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마왕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기라도 할까 봐 우려되는 모양이었다.


비행 중인 헬기 내부, 펑쉐펑은 한국인 남매를 두렵게 쳐다보았다.
그는 인민해방군 소속의 각성자를 통틀어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였다. 헌터까지 포함해도 최상위권이었다.
사실 펑쉐펑에게는 비밀리에 하달받은 임무가 있었다.
전투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현장지휘관으로서 적절한 창의성을 발휘해서 공을 뺏는 것이었다. 남이 다 해놓은 밥에 수저를 꽂으라는 명령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체면 따위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펑쉐펑이 개입하는 상황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90분 남짓한 혈투 끝에 마왕이 목숨을 잃었으니까 말이다.
인민해방군의 장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중국인으로서는 기뻐해야 하는 일이었다.
‘저 괴물이 일주일만 더 살아남았다면 국운이 기울었을 테지.’ 이미 중국은 엄청난 피해를 본 상태였다. 측정하기 힘든 경제적 손실, 외교적 위상의 추락, 그리고 중국이 자랑하던 최정예 헌터 수십 명이 몰살당하지 않았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나마 여기서 마무리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만, 펑쉐펑의 표정은 안도감과 거리가 멀었다.


오늘 이후 이어질 외교적 굴욕과 후폭풍을 걱정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실시간파워볼
펑쉐펑이 엘리트 장교이자 미래의 공산당 중앙위원이긴 하지만, 아직 국제관계까지 개입할 정도로 거물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피부에 와 닿는 살기.

전투의 여파 탓인지 권씨 남매는 지금도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분명히 지친 상태일 텐데도 펑쉐펑을 질겁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그걸 자각하지 못한 듯 한국말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이거 그냥 칼이 아닌 것 같은데.” “그야 당연히. 그만한 괴수가 쓰던 칼이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테스트 삼아 마력을 운용해봤더니 반응이 좀 특이해. 확신은 못 하겠지만 사용자한테 자기 치유 효과를 부여하는 것 같은데?” “허. 세상에. 아티팩트였네.” 가끔은 탄성을 뱉고 심지어 웃기까지 하는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토록 흉포한 기세를 표출하는 와중에(물론 전투 직후라는 사실은 감안해야겠지만)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섬뜩했다.
‘정말 인간인가, 저것들이.’ 펑쉐펑은 저들과 차마 눈 맞출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피했다.
좀 비참하지만 저들이 혹시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줄까 두려웠다. 그 어떤 중국인보다 가까운 곳에서 남매의 압도적인 무위를 구경한 탓이었다.
저 남매의 적대감을 사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아니,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권윤기는 이미 펑쉐펑의 존재를 인지한 듯했다. 곧이어 초췌한 표정으로 펑쉐펑에게 시선을 돌린 권윤기였다. 그리고는 정직한 발음의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서부집단군 소속인가? 중국은 집단군별로 특수부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무장경찰대 소속이다.” “무장경찰대? 아, 그렇지. 무장경찰대 편제에 집어넣고 대테러부대처럼 써먹는 게 효율이 더 높긴 하겠네. 어쨌거나 그 정도면 인민해방군 최상층부랑 소통할 수 있겠네. 공산당 수뇌부하고도 연줄이 닿을 거고.” “당신은 인민해방군 편제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교관급….” 펑쉐펑은 권윤기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말을 돌리려고 애썼다. “나는 일개 교관급이라 뭘 모른다.”라고 둘러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권윤기는 펑쉐펑을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일개 성의 무장경찰부대를 총지휘하는 게 대교급이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그 나이에 대교면 다른 장교들이랑 다른 트랙으로 진급하고 있을 테고. 아닌가?” “…….”
“척 봐도 견적이 나오는데 실무자인 척하는 건 무슨 의도야. 말 정도는 전할 수 있잖아.” 이 질문에, 펑쉐펑은 잠시 더듬거리면서 침음까지 흘렸다. 부하들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인 셈이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의 부하들도 겁에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펑쉐펑은 눈치를 살피면서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무슨 말을, 전하면 되나.” “너희는 곧 튀르키예, 미국과 교섭을 진행하게 될 거다. 위구르 지역에 해당 국가들의 공관이 설치될 예정이니 당연히 교섭해야겠지. 이후로는 위구르의 독립이 본격화될 테고.” “…그래.”
“그리고 그 교섭에 한국 외교부도 참석시킬 예정이다. 위구르가 독립할 때까지 한국이 지속적으로 관여할 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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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자치구에 튀르키예와 미국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중국은 뒤집힌 상태였다. 미국 백악관 안보실장이 위구르족 독립운동단체와 공공연히 연락하고 있었고, 중국군 수백 명을 살해했던 위구르 무장독립단체도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국이 계속 개입하겠다니.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권윤기의 태도는 전혀 광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산당 수뇌부에서 권윤기의 요구를 거절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권윤기였으니까.
언뜻 생각하면 위급한 상황이 끝났으니 약속을 깨도 무방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권씨 남매가 선보인 무력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듯했다.
‘만약 우리가 약속을 어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중국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S급 헌터 몇 명이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고, 아니면 주요 군기지에 불청객이 몰래 다녀갈 수도 있었다. 중국은 저항하지 못할 테고.
펑쉐펑은 자괴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윤기는 그에게 보너스까지 살포시 얹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요즘 중국 소수민족 문제에 관심이 생겼어. 나중에 티베트나 내몽골에 방문해도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해줘.” “…….”
앞으로도 중국을 계속 괴롭히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펑쉐펑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들을 태운 헬기가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펑쉐펑이 그들을 호텔까지 에스코트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의 공무원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공무원만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이미 일군의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남매에게 멘트 한마디라도 따내기 위해서였다. 권윤기는 전투 때문에 피폐해진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섰다.
직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본인의 전공에 대한 자화자찬이 아니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중국에 닥친 중대한 위기 하나를 해결해줬습니다. 저 강력한 괴수가 중국 시베이 지구에서 일주일만 더 날뛰었다면 수많은 인명이 스러졌을 겁니다. 이제껏 중국이 겪어보지 못한 재앙이 닥쳤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중국인들을 가엾이 여겨서 위험한 싸움을 감수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위구르 자치구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제 개입은 더 늦어졌을 겁니다.” “이제 중국 정부도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처럼 힘에 기반한 외교를 펼치면서 타국을 무시하고 패권주의를 추구하던 시절은 끝났다는 것을 말입니다. 본인들이 국제 사회에서 누리던 위치가 변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중국도 겸손을 배워야 할 겁니다. 그게 중국에도 유익한 길입니다.” 중국의 위상이 꺾였다는 사실을 대놓고 못 박는 모습이었다.
넝마가 다 된 방호구를 걸친 모습이었지만 그의 설득력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여동생 하나 데리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이미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권슬기가 마왕의 목숨을 끊는 초근접 위성촬영 영상이 전 세계에서 화제에 올라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을 질질 끌면서 기어가는 마왕을 천천히 난자하는 권슬기의 모습. 그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 자명했다.


*** 파워볼게임
아직 싸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새벽.
나는 우루무치에 소재한 한 호텔에서 쉬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그만한 전투를 치른 직후에 곧바로 몸을 추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피곤해서 잠을 이루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슬기는 톡으로 나한테 이번 전투의 소회를 전하고 있었다.
[앞으로 1년 정도는 나름 충만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오빠한테 말은 안 했는데 규격 외 게이트 출현했다는 소식 들릴 때마다 관심이 생기긴 했거든. 오빠가 국제교류 어쩌고 하는 거 시작한 이후로는 더 그랬고. 그런데 처음으로 소원성취했네.] [역삼게이트에서 나온 애들은 드래곤이었다며? 나도 드래곤 아종들이랑은 종종 싸워봤는데 드래곤은 아직이야. 잡아보고 싶네.] 규격 외 게이트가 출현할 때마다 헌터가 여러 명 죽어 나간다는 걸 고려하면, 슬기의 말이 조금은 잔혹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물론 위구르 게이트나 역삼게이트 수준으로 참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이트는 드물지만, 최근 탄자니아나 독일에서 출현한 게이트만 해도 해당 국가의 S급을 몇 명씩이나 죽인 거대한 재난이었다.
해당 국가들은 지금도 침울한 분위기였다. 중국처럼 민간의 재앙으로 번지지 않았을 뿐 S급 몇 명 죽는 것만으로도 국력이 크게 깎여나가는 일이니까.
‘그런 게이트를 무슨 자아실현의 장으로 여기면 좋은 소리 듣기 힘들지.’ 그러나 꾸짖을 일도 전혀 아니었다. 어차피 슬기는 중학교 졸업한 이후로 칼질밖에 모르고 살아온 애였다.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사치에는 별 관심이 없고, 명예나 권력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런 애가 생사를 건 혈투로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건 흠이 아니었다. 슬기 본인도 이런 기회를 준 나한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고맙긴.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따로 사례할 생각은 없지만, 슬기 덕분에 내가 크게 재미를 본 건 사실이었다.
일단 우리 남매의 위력이 전 세계에 증명된 상태였다.

나야 그 이전에도 세계 최강의 힐러로서 존중받고 있었다. 당장 UN에서도 나한테 들이대지 않았던가. 그러나 슬기는 “한국에 괴물이 한 명 있다.”라는 명성만 있을 뿐 실제로 어느 정도 역량인지는 알려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슬기의 능력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식한 괴수에게는 슬기의 스텔스 이능이 통하지만, S급 헌터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예 투명해지는 것도 아닌데 기척만 감출 수 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었으니까. 마력 감응이 예민한 헌터라면 슬기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오해할 만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오해가 해소된 셈이었다. 마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헌터보다 막강한 마력을 가진 괴수였으니까 말이다. 슬기가 마음만 먹으면 정체를 숨긴 채 누구든 처치할 수 있다는 걸 다들 알게 됐겠지.
‘심지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덕분에 영상까지 남아 있지.’ 물론 나는 슬기를 진짜 암살자로 활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미친 짓을 할 거라면 내가 구태여 선거에 출마하고 국회에서 수고스럽게 사람을 만나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일단 쿠데타부터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겠지. 그 이후 펼쳐질 환란은 어떻게든 수습하면 되니까.
그러나 특정한 상황에서는 슬기의 능력을 활용하지 말라는 법도 엔트리파워볼 없었다. 특히 그 상대가 중국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실은 지금도 중국 측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싸움을 계기로 향후 한중관계의 양상은 크게 바뀔 예정이었다. 사소하게 충돌할 때마다 우리 남매의 존재를 떠올리게 될 테니 당연했다.
그리고 공산당 수뇌부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 건 덤이었다.
위구르 독립과 국채 소각. 그리고 수백만 명의 난민과 천문학적인 경제손실. 누군가는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만약 다른 나라였다면 민란이 일어나서 대통령이 하야하고 국외로 도피하는 루트를 탔겠지만, 중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아마 수뇌부 중에서 몇 놈 제거하고 나머지는 생존을 추구하려고 하겠지. 지금도 욕받이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나는 그들이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불씨를 놓고 떠날 생각이었다.
슬기는 만족한 것 같으니 혼자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하루 이틀 더 남아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엄청난 타격을 입은 상대를 추가로 짓밟는 건 인정상 못 할 짓이지만, 정치는 인정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힐러인데 정치 만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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