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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로 눈을 돌리다 (1) > 헌터업계를 장악한 이후에도 권력을 만끽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길드장들을 세워놓고 충성맹세를 받을 시간도 없었다.
그동안 구조조정에 열중하느라 뒷전에 미뤄둔 숙제가 밀려든 탓이었다.
“부회장님. 접견 요청이 밀려 있어서요. 언제부터 받으실 건지.” 정아윤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충을 호소했다.
업계의 모든 권력이 나한테 집중된 탓일까. 지금도 갖은 핑계로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아윤은 기왕 찾아온 손님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커피 정도는 꼬박꼬박 내주고 있다고 했다.
“가만히 있기가 민망하신 건지 자꾸 리필을 요청하시더라구요. 커피머신 고장 날 지경이네요.” 정아윤은 본의 아니게 카페 알바로 변신해서 50잔 이상의 커피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원래 반자동 머신을 이용했지만, 편의를 위해서 캡슐 머신으로 교체하는 방향을 고려하는 중이라고 했다.
언제까지고 비싸게 굴 수도 없는 법. 나는 차라리 빨리 해결하고 끝내자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한 명씩 들여보내.”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사실 기분 같아서는 쳐내고 싶었다.
권력자에게, 혹은 권력을 쥐고 있다고 평가되는 인사에게 찾아오는 손님 중 태반은 영양가랄 게 없는 인물들이었다. 애초에 뭔가 아쉬운 게 있어서 찾아오는 이들이니까.
그러나 굽실거리는 친구들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권력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유력자의 집무실 앞에서 대기표를 끊고 기다리는 손님의 숫자는 권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자 다채로운 얼굴의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앞으로도 쭉 겪을 일이니 미리 익숙해지는 것이 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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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협회의 대관업무를 위탁받길 원하는 업자들이 얼굴을 비췄다. TV에 곧잘 등장하는 마케팅 전문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저, 권윤기 부회장님. 지금 협회 이미지가 비교적 준수합니다. 이게 다 권윤기 부회장님 공이죠. 그런데 이럴 때일수록 PA 부문에 공을 기울이셔야···.” “최근까지 협회 대관 담당하던 법무법인이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아, 예. 그야 물론.” 법무법인 성종. 얘네는 연 매출의 30퍼센트를 잃고 국회의원들한테 찍히는 바람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대관팀에서 일하던 서른 명 남짓한 직원이 전부 백수가 됐고, 변호사 여럿도 스스로 떠났다고 했다.
그 꼴을 보고서도 협회의 대관업무를 위탁받길 원하다니. 돈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마저 넘어선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미안하지만 협회 예산도 많이 줄었습니다. 내년부터 회비를 절반으로 삭감할 예정이라서.” “아, 저희는 로펌이 아니라 마케팅 전문가들입니다. 실적도 없이 거액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상업용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그 지표에 따라 성과급을 받는 식으로 일할 때가 많습니다.” “······.”
“혹시 기회를 주신다면 절대 실망감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보아하니 300억까지는 아니어도 거액을 달라고 할 것 같았다. 여론조사 운운하는 걸 보니 성종처럼 무식하게 일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금액을 내줄 메리트도 보이지 않았다.
“저, 권윤기 부회장님?” “설마 이 자리에서 확답을 달라는 겁니까?” “아, 물론 그건 아니고 인사 올리는 차원에서···.” “마케팅회사에서 오래전부터 대관업무 대행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특이하네요. 2~3억짜리 용역 하나도 경쟁 입찰로 붙이는 게 보통 아닙니까?” “아무래도 지금까지 헌터협회가···.” “예. 지금까진 수의계약으로 아무한테나 던져주곤 했죠. 저는 그렇게 일 안 합니다.” 마케팅회사 임원은 이후로도 잠깐 꾸물거리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300억씩 너그럽게 빨려주던 물주라면 몇십억 정도는 쉽게 지출할 거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타당한 판단이지만 응해줄 순 없었다.


그다음 순번으로 찾아온 친구는 조금 다른 의미로 징징거리는 사람이었다.
“항산기공 양태주 사장입니다.” 헌터들의 장비를 제작하는 업체의 대표였다. 특

히 무기에 치우친 업체였다.
장비시장. 헌터들의 머릿수가 적다 보니 아주 큰 시장은 아니지만, 교체 주기가 짧고 가격이 비싸다 보니 만만한 규모도 아니었다. 정밀가공에 특기가 있는 업체 여러 곳이 시장에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창칼 만드는 업체가 뭣 하러 찾아왔지?’ 설마 나한테 검술 배우라고 권하려는 건 아닐 테고. 만약 내 밑에 거느린 헌터들한테 자기네 회사가 제작한 무기를 쓰게 하라고 요구할 생각이라면 깔끔하게 물리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항산기공의 대표는 의외로 스케일이 매우 컸다.
“항산기공이 이번에 터키 진출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터키?
“부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저희가 헌터용 장비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총기류도 생산하는데 예전에 터키에 반제품을 수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헌터용 장비시장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정말 장한 일이긴 한데 뭘 어쩌자는 걸까. 나는 웬만하면 놀라는 법이 없는 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의아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항산기공 사장은 그런 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까지 두들겼다.
“어휴, 부회장님. 부회장님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힐러 아닙니까. 헌터협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 앉아계시구요.” “그거랑 터키 시장이 무슨 상관인지.” “회장님께서 판로개척을 도와주셔야죠, 당연히.” 이런 부탁을 대놓고 할 줄이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부탁하니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내가 헌터협회 부회장인지 아니면 무역협회 마스코트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제가 어떻게 돕습니까?” “간단하죠. 한국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터키는 협회보다는 게이트안전보장부라는 부처가 거의 말아먹는 구좁니다. 현직 헌터가 부처의 주요 포스트를 장악하고 있구요.” “그분들 초청해서 행사라도 하라는 겁니까.” “그것도 좋죠. 권윤기 부회장님이 나서면 그쪽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겠습니까? 한국-터키 관계증진에도 기여하고 한국기업들 판로개척도 지원해주시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


창칼 몇 자루 판다고 한-터키 관계증진에 도움이 될까 싶긴 하지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뭣했다. 자랑스러운 수출역군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데 대놓고 까내기도 뭣했고.
무엇보다 난감한 건 업체 대표의 저 해맑은 표정이었다. 본인이 떳떳한 일을 한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솔직히, 터키에 수출 좀 해봤자 돈은 안 남습니다. 헌터 장비는 미국, 독일, 일본이 과점하는 시장이라 한국 업체가 끼어들기가 힘들어요. 당장 한국 헌터들도 독일제를 더 좋아하더군요.” “거, 대표님.”
“가까운 시일 안에 토종기업의 경쟁력을 꼭 입증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후로도 그의 포부를 한동안 더 들어줘야 했다. 꿈꾸는 표정으로 K-도검류의 우수성을 외치는 기업인을 차마 물리칠 수가 없었다. 사실 얘네는 슬기의 뼈칼을 만드는 회사이기도 했다.
“대표님, 꼭 좀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언급 정도는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놓고 돈 달라고 찾아온 마케팅회사, 그리고 터키 진출을 노리는 꿈과 희망의 기업인.
이들만으로도 난감하지만 이외에도 난적은 있었다. 바로 혈연의 정을 강조하면서 꾸물꾸물 접근하는 이들이었다.
“저, 권윤기 부회장님. 친척이라는 분이 찾아왔는데···.” “···휴.”
정아윤의 보고를 받자마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조손가정 출신이었다. 할머니 밑에서 동생이랑 단둘이 자랐고, 실은 그 할머니도 몸이 성치 않은 분이라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이후부터는 슬기와 단둘이서 살았고.
그러나 친척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촌수로만 따지면 의외로 가까운 친척이 몇몇 있었다. 친가 쪽으로는 큰할아버지와 당숙 등이 있었고 외가 쪽으로도 몇 명 있었다. 이름이야 모르지만.
실은 내가 처음 헌터가 됐을 때도 은근슬쩍 들이대는 인간이 여럿이었다.

  • 윤기야. 너 학업이랑 헌터생활 병행하느라 힘들 텐데 슬기는 우리가 맡아서 키워줄까? 뒤늦게나마 사람 구실 하고 싶어서 그래.
  • 나는 너희들한테 잘해주고 싶었는데 느이 할머니가 막는 바람에···!
    당연하지만 핏줄의 정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속내가 너무 뻔히 드러나 보이는 행보였으니까. 내가 각성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한영대 재학 헌터라는 기사가 뜨지 않았다면 코빼기도 안 비쳤을 이들이었다.
    그때는 은근히 달라붙는 친척들을 틀어막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세이프파워볼
    개중 유난히 적극적인 한 명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슬기한테 접근해서 멋대로 피자를 사먹이고 옷까지 사입히기도 했다. 그땐 정말 뚜껑이 열렸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슬기한테 뭐라고 하기도 뭣한 노릇이었고.
    ‘그런데 이번에 또 나타났다 이거네.’ 다행히 이들은 꿈꾸는 기업인보다 한결 쉬운 상대였다.
    어차피 이들은 호구 기질이 심각한 슬기마저도 뜯어먹지 못한 애들이었다. 슬기가 살짝 부족하긴 하지만 친척의 탈을 뒤집어쓴 하이에나들한테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다를 줄 알고 찔러보는 건가.’ 딴에는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었다. 나는 슬기와 달리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는 인간이라는 티를 내면서 살았으니까 말이다. 잘만 들이대면 애기들 등록금 정도는 따먹을 수 있겠다고 여긴 거겠지.
    “저, 부회장님. 어떻게 하실 건지.”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입구컷이었다.
    “지금 임시출입증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나?” “네. 1층에서 대기 중입니다.” “직원들한테 지시해서 내보내요. 앞으로 내 친척 자처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예 출입 자체를 불허하라는 지시도 남기고.” 이번에 찾아온 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인연을 맺을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딱히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만나는 것 자체가 무익한 짓이었다.
    물론 입구컷을 당한 당사자들이야 속상하겠지만 그것까지 알아줄 도량은 없었다. 그냥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 뿐.
    “고생하셨습니다. 부회장님.” 나는 그동안 미뤄뒀던 접견을 마무리한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즐기면서 하자고 되뇌긴 했지만, 솔직히 피곤했다.
    그나마 웃픈 점이 하나 있다면 내가 S급 헌터라는 걸 알면서도 또 A급 헌터를 몇십 명씩 거느린 대형 길드를 박살 내는 걸 뻔히 봤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 또한 권력의 속성이었다. 조금은 폭압적으로 힘을 과시해도 달라붙는 인간은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동안 미룬 숙제를 전부 마친 뒤 펜트하우스로 퇴근했다. 슬기는 그런 나한테 대뜸 돌직구를 던졌다.
“오빠. 내년이면 오빠도 서른세 살이겠네.” “······.”
나는 슬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딱히 공격받은 기분은 아니었다.


처음 돌아와서 나이를 소급해서 먹었을 때는 잠깐 당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주민등록상 나이를 20대로 고쳐준다고 제안하면 오히려 거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중딩이었던 여동생이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가 되어 있는 것도,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나보다 열댓 살쯤 많아 보이는 조상규를 보는 것도 가끔 어색할 때가 있으니까.
다행히 슬기가 날 능욕하려고 나이를 거론한 건 아니었다. 세이프파워볼
“이 바닥에서는 딱히 젊은 나이도 아니잖아. 대부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각성해서 전업 헌터가 되니까.” “그래. 험한 바닥이니 젊은 나이부터 노장 취급 받긴 하지.” “그런데 거기서는 오히려 좀, 어린 편이지 않나?” 슬기가 말한 ‘거기’가 어디일지는 뻔했다. 아마도 정치권을 의미하는 거겠지.
정치권에서 서른세 살이면 핏덩이 수준이긴 했다. 스물몇 살짜리 비대위원장이나 청년비례도 있긴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있다고 서른세 살이 노장으로 취급받는 건 아니었다.
다만 슬기가 내 나이가 어려서 걱정해주는 건 아닌 듯했다. 지금의 정치권에 나이를 핑계로 날 무시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눈치가 있다면 애초에 나이 따위를 거들먹거리지도 않을 테고.
결국 얘는 내가 언제쯤 현실정치에 발을 담글 건지, 그리고 그 시점이 이미 도래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였다.
헌터업계 구조조정을 마치자마자 전직할 거냐고 물어보는 건 너무 성급하다 싶긴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시기만 따지면 오히려 적기였다. 내년에 총선이 열릴 예정이니까.
‘고민할 때가 되긴 했지.’ 나는 뭐라고 더 물어보려고 하는 슬기에게 일단 술병을 안겨주었다. 제주지사가 사재로 대주고 있는 고소리술이었다.
고소리술을 보니 모처럼 제주도에 내려가서 정계 진출의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폼 잡고서 ‘제주도 구상’ 같은 걸 발표하려는 게 아니라 실무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설립만 해놓고 지금까지 한 번도 들여다본 적 없는 대원 길드. 아직 신생에 불과하지만, 제주도 정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총선에 영향을 끼칠 정도.
그 현황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정계 진출을 한결 수월하게 구상할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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